이정선 <<파동 WAVE>>

 

시간을 담아낸 색면의 선율 - 김도연 (미술비평, 홍익대학교 겸임교수)

처음은 늘 특별하다. 그리고 그 처음이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찾아왔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번 전시는 이정선 작가의 첫번째 개인전이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긴 시간동안 쌓여온 그녀의 작품들은 몇 차례 단체전을 통해 관람객들과 만나 왔지만 이처럼 여러 시기의 작품을 모아 한 공간에서 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그렇기에 A BUNKER에서의 이번 전시는 그간 변화해 온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자리이자 작가로서 이정선의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는 특별한 기회이다. 이정선 작가는 오랫동안 예술교육자로 활동해 왔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 오랜 기간 그녀의 주된 창작의 방법이었다면 팬데믹을 기점으로 하여 이정선 작가는 자신만의 창작에 오롯이 몰두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친 여러 작품이 전시되는데 그 작품 들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긴 시간의 흐름을 따라 흐르고 있는 그녀의 직인과도 같은 색면조각이다. 자그마하게 쪼개어진 도형들로 이루어진 이 모티브는 일찍이 구작인 <교정의 버드나무>나 <비 갠 오후의 휴식>에서도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했었다. 2022년작인 <일출>에서는 화면의 일부를 차지한 이 색면들이 스며 나오는 듯 그 존재감을 확장 시키고 있다. 조각보를 연상시키는 색면 모티브는 실은 얇은 나무 판 위에 그려진 것으로 큰 작품 안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기도 하다.

잘게 나누어진 색면들로 이루어진 화면은 미묘하게 다른 색들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화면을 분할한 선은 직선이기는 하나 작가의 호흡을 느낄 수 있도록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그리고 그 안에 채워진 색들은 매일 아침의 날씨와 햇살이 다르듯 자유롭게 변화한다. 이정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삶의 일부라 이야기한다. 그것은 예술이 그녀에게 가지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이를 넘어서 이정선 작가에게 예술은 생활 곳곳으로 스며들어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성질의 것이다. 평면을 넘어 가구로 확장을 시도했던 전작들은 이런 작가의 상상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할 때도, 쉴 때도 마치 숨쉬듯 그녀는 이 작은 조각들을 나누고 그 안에 색을 칠한다. 이 색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물감이 화면 위에 얹히거나 덮여 있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정선 작가의 색은 그리기 뿐만이 아니라 지우기를 거쳐 완성된다. 나무 판 위의 수채물감은 지우기를 통해 더 깊게 스며들어 흔적으로 남는다. 자신이 행한 것을 스스로 삭제하는 일, 작가는 색을 채우는 행위보다 지우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카타르시스를 주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지우는 행위는 자신의 시간을 뒤돌아보며 나아가는 그녀만의 방식이지 않을까? 그리고 매일 살아나가는 우리의 삶이 얼굴 곳곳에 남듯 지워낸 후에도 작가의 색들은 남아있다.

어떠한 의도나 계획 없이 그저 색을 채워 넣고 다시 지우는 것, 계획하지 않고 마치 무념무상과 같은 편안한 상태로 그리고 지우는 작업을 반복해왔기에 그녀는 이를 긴 시간 지속할 수 있었다. “무엇인가를 그리거나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자연스럽게 남겨진 이 화면들은 도리어 작가 자신의 호흡과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렇게 쌓인 납작한 색면조각들의 작은 산은 마치 시간의 조각더미와 같다. 조각보를 만들던 옛 여인들이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여러 천조각들을 엮어 아름다운 화면을 구성하듯 이정선은 흘러가는 시간을 작은 색들로 남기는 것이다. 조각보의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그렇듯 큰 화면 안에서 작은 색면들은 각자 주목받거나 의미를 가지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없이 움직이는 손놀림으로 기록된 시간의 축적들은 흘러가는 선율처럼 어우러져 시시각각 변해가는 일몰의 하늘처럼, 혹은 들꽃이 흐드러지는 봄날의 들판처럼 그녀의 삶의 일부를 담아낸다. 그렇기에 나에게 손바닥만 한 이 색면들은 화면의 크기를 넘어서는 무게로 다가온다.


색과 면을 담아내는 본능적인 감각, 그리고 오랜 기간 그림을 그려온 원숙함과는 상반되게 작가로서 이정선은 이제 시작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무한히 자라날 수 있는 씨앗과도 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작가는 여전히 화면 속에 여러 실험들을 하고 있다. 삶의 일부분으로 오랜 기간 지속해왔기에 그녀의 색면들은 작지만 단단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의 조각들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까? 그간 그녀가 조용히 읊조려온 삶의 노래가 이제 더 큰 소리로 울려 퍼지길, 더 크고 많은 그녀의 세계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순환_Mixed media on canvas_40x40cm_2024


순환_Mixed media on canvas_0x40cm_2024






COSMOS Ⅳ_Mixed media on panel_75x75cm_2024




사고의 틀Ⅰ_Mixed media on panel_2023


Jandari-ro, Mapo-gu, Seoul,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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